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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섭/팩토리나인] 질투와 욕망, 비밀 그리고 한 명의 탐정 '76층 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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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회 작성일 25-06-27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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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거짓말을 쌓는 사람들, 그걸 지켜보는 한 사람 - 이웃의 민낯, 그리고 거짓의 이유들

처음에 이 책의 줄거리나 정보를 보고 여성 중심 서사라는 점에서 흥미를 가졌다. 특히 여성이 탐정이 등장한다는 점만으로도 이 작품은 내게 충분히 신선하고 끌리는 설정이었다. 여성 탐정이 등장하는 작품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단지 그것 하나만으로도 '76층 탐정'은 이런 장르 소설 안에서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고 느꼈다. 여성 탐정이 사건을 해결해 가는 이야기를 통해 ‘이야기의 중심에 선 여성’의 시선을 따라갈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 흥미롭기 때문이다. 읽는 동안 떠오른 작품들도 있었다. '환락송' 같은 중국이나 대만의 여성 중심 드라마들, 혹은 우리나라의 ‘그린 마더스 클럽’ 같은 드라마. 물론 이 소설은 전형적인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거나 우정을 다루거나 하는 드라마는 아니지만, ‘고급 아파트’라는 밀집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갈등, 비밀은 꽤 유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더욱 흥미로웠다.

스토리는 전체적으로 가볍게 읽히는 추리소설에 가까웠다. 미스테리의 밀도나 서사의 복잡함보다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선과 ‘관계성’에 좀 더 방점이 찍혀 있는 느낌이다. 누가 범인인지 맞히는 추리의 쾌감보다는, 등장인물들의 ‘진짜 마음’이 밝혀지는 진행 방식이 더 중요한 작품이었다. 그 안에는 질투와 오해, 외로움 같은 감정이 얽혀 있고, 그러한 갈등은 아파트의 구조처럼 층층이 쌓여 있다. 이 책이 내게 인상 깊었던 이유는, 바로 아파트의 구조처럼 쌓인 그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많은 감정을 숨기게 된다. 걱정될까 봐, 부담스러울까 봐, 혹은 그 진심이 들킬까 봐. 그래서 우리는 종종 거짓말을 한다. 나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또 가끔은 이유도 모른 채. 하얀 거짓말이라고 하나?
책 속 인물들도 그런 감정을 안고 있다.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조심스레 다가가다 멀어진다. 한 사람이 진실을 말하면, 나도 진실을 꺼내야 할까 봐 두려워서 오히려 더 철저히 숨긴다. 사람의 마음도 건물처럼 층을 이루고 있다면, 진심은 아마 가장 위나, 혹은 가장 아래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단순히 사건을 해결하는 추리소설이라기보단, 사람들의 감정을 추적해가는 심리 소설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누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들의 진심은 어디에 있었는지. 탐정이 밝혀낸 건 범인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무거운 분위기의 추리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조금 가볍게 느껴질 수 있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이 작품을 더 매력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했다. 따라가기 쉬운 구성, 공감 가능한 갈등, 그리고 여성 탐정이라는 신선한 설정이 추리소설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사뭇 다르게 다가갈 것 같았다. 이 책을 읽으며 문득 떠올랐다. 코난의 쿠도 신이치(남도일)나 셜록 홈즈, 아르센 뤼팽이나 포와로 등등 이들은 모두 공통점이 있다. 유명하고, 뛰어난 이라는 것, 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 여유, 지적 여유, 시간의 여유. 삶에 치여 허덕이는 사람에겐 남의 거짓을 파헤치는 일이 사치처럼 느껴진다. 불행하거나 바쁜 사람은 진실을 추적할 수 없다. 그들에겐 숨겨진 진실보다 당장의 삶이 더 중요하니까. 어쩌면 진실을 쫓는다는 건, 삶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종의 유희인지도 모른다. '76층 탐정'의 여자 탐정 역시 그런 인물이다. 부유하고 심심하며 외로운 여자. 자신이 사는 고층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찰하며 ‘탐정 놀이’를 한다. 그 모습은 처음엔 조금 가볍게 느껴졌지만, 읽을수록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질투와 불신, 비밀과 위선이 얽혀 있는 고급 아파트 속 사람들의 민낯. 누구도 완전히 믿을 수 없고, 모두가 조금씩 숨기고 있는 그 진실. 하지만 진실을 추적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닮은 인물을 조용히 의심하고 있을지 모른다. 페이지를 덮은 뒤, 내 옆에 있는 사람의 표정을 한 번 더 살피게 되는 소설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마음이 저 안에 있지는 않을까, 혹은 나도 내 마음을 들킬까 봐 숨기고 있진 않았나? 같은 공간, 같은 층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진심을 감추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결국 우리는, 각자의 마음속 층계 어딘가에 진심을 숨긴 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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